어느 날 보았습니다 먼 나라의 실험실에서 생의학자가 내가 가진 인간에 대한 기억을 쥐가 가진 쥐의 기억 안에 집어넣는 것을 나와 쥐는 이제 기억의 공동체입니다 하긴 쥐와 나는 같은 별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습니다 사랑을 할 때 어떤 손금으로 상대방을 안는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생각했지요 쥐의 당신과 나의 당신은 어쩌면 같은 물음을 우리에게 던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손을 잡아줄래요? 피하지 말고 피하지 말고 그냥 아무 말 없이 잡아주시면 됩니다 쥐의 당신이 언젠가 떠났다가 불쑥 돌아와서는 먼 대륙에서 거대한 목재처럼 번식하는 고사리에 대해서 말을 할 때 나의 당신은 시간이 사라져버린 그리고 재즈의 흐느낌만 남은 박물관에 대해서 말할지도 모릅니다 쥐의 당신이 이제 아무도 부르지 않는 유행가를 부르며 가을 ..
미망 Bus - 심보선 노선을 잃었다 버스 노선과 정치적 노선 둘 다 멸망하는 세계가 나보다 명랑하다 휴일과 섹스는 빼고 버스 맨 뒤에 앉아 버스 맨 앞을 노려본다 지금 건너는 다리는 소실점까지 길게 난 흉터 같다 그래서 좋다 차창에 기대 노루잠에 빠진다 치어 떼처럼 망막 위를 헤엄치는 빛의 산란 꿈속에서조차 나는 기적을 행하지 못한다 숨 꾹 참고 강바닥을 걸어 도강(渡江) 한다 뒤돌아보면 강물 위를 사뿐사뿐 걸어가는 옛 애인 기적처럼 일어났던 사랑을 잃었다 꿈과 현실 둘 다 같은 고백을 여러 번 통과하며 형형색색 분광하는 생 지루함은 나의 무지개 내 그림자는 빛의 정반대 내 언어는 정반대의 정반대 버스는 갈팡질팡 달린다 그래도 좋다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 44~45쪽 필사하였습니다. 지루..
식후에 이별하다 - 심보선 하나의 이야기를 마무리했으니 이제 이별이다 그대여 고요한 풍경이 싫어졌다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것 그런 것들은 도무지 재미가 없다 거리는 식당 메뉴가 펼쳐졌다 접히듯 간결하게 낮밤을 바꾼다 나는 저기 번져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질테니 그대는 남아 있는 환함 쪽으로 등 돌리고 열까지 세라 열까지 세고 뒤돌아보면 나를 집어 삼킨 어둠의 잇몸 그대 유순한 광대뼈에 물컹 만져지리라 착한 그대여 내가 그대 심장을 정확히 겨우나 쏜 총알을 잘 익은 밥알로 잘도 받아먹는 그대여 선한 천성(天性)의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이를테면 내가 죽 한 그릇 뚝딱 비울 때까지 나를 바라보며 그대가 속으로 천천히 열까지 세는 소리 안 들려도 ..
자두 - 허수경 익은 속살에 어린 단맛은 꿈을 꾼다 어제 나는 너의 마음에 다녀왔다 너는 울다가 벽에 기대면서 어두운 걸레로 바닥을 닦았다 너의 얼굴에는 여름이 무참하게 익고 있었다 이렇게 사라져갈 여름은 해독할 수 없는 손금만큼 아렸다 쓰고도 아린 것들이 익어가면서 나오는 저 가루는 눈처럼 자두 속에서 내린다 자두 속에서 단 빙하기가 시작된다 한입 깨물었을 때 빙하기 한가운데에 꿈꾸는 여름이 잇속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말 이전에 시작된 여름이었다 여름의 영혼이었다 설탕으로 이루어진 영혼이라는 거울, 혹은 이름이었다 너를 실핏줄의 메일에게로 보냈다 그리고 다시 자두나무를 바라보았다 여름 저녁은 상형문자처럼 컴컴해졌다 울었다, 나는 너의 무덤이 내 가슴속에 돋아나는 걸 보며 어둑해졌다 그 뒤의 울음을 감당할..
아사(餓死) - 허수경 마지막 남은 것은 생후 4개월의 소였다 씨앗을 뿌리지 못한 밭은 미래의 지평선처럼 멀었고 지평선 뒤에 새로 시작되는 세계처럼 거짓이었다 아이는 겨우 소를 몰았다 소는 자꾸만 주저앉았다 아이의 얼굴이 태양 아래에서 검은 비닐처럼 구겨졌다 소의 다리가 태양 아래에서 삼각형으로 고꾸라졌다 인간의 눈은 태양신전이 점령한 전쟁터 임시병원이었고 짐승의 눈은 지옥신전에 갇힌 포로였다 아이는 두 팔로 소를 밀었다 소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다 아이도 주저앉아 소를 밀었다 소는 빛 속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아이는 소를 제 품에 안았다 둘은 진흙으로 만든 좌상이 되어간다 빛의 섬이 되어간다 파리 떼가 몰려온다 파리의 날개들이 빛의 섬 위에서 은철빛 폭풍으로 좌상을 파먹는다 하얗게 남은 인간과 짐승의..
포도 - 허수경 너를 잊는 꿈을 꾼 날은 새벽에 꼭 잠을 깬다 어떤 틈이 밤과 새벽 사이에 있다 오늘은 무엇일까 저 열매들의 얼굴에 어린 빛이 너무 짧다, 싶을 만큼 지독한 날이다 너를 잊다가 안는 꿈을 꾼다 그 새벽에 깬다 잎의 손금을 부시도록 비추던 빛이 공중에서 짐짓 길을 잃는 척할 때 열매들이 올 거다 네가 잊힌 빛을 몰고 먼 처음처럼 올 거다 그래서 깬다 너를 잊고 세계가 다 저물어버린 꿈여관, 여기는 포도가 익어가는 밤과 새벽의 틈새 문학과지성 시인선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 허수경 36~37쪽 필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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